"명절에 며느리·사위 자리에서 유독 지치는 것은 성격이 예민해서가 아닙니다. 속마음과 다른 표정을 하루 종일 지어온 마음의 노동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명절 연휴가 끝나면 이너프심리상담센터에는 조금 특별한 피로를 이야기하는 분들이 찾아오십니다. 몸을 많이 쓴 것도 아니고 누구와 크게 다툰 것도 아닌데 집에 돌아오면 말 한마디 할 힘이 남지 않는다고 하세요. 시댁이나 처가에서 착한 며느리, 괜찮은 사위로 보내는 하루는 생각보다 많은 힘을 씁니다. 그 힘이 어디에 쓰였는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에요.
이 글에서는 그 피로가 어디서 오는지 먼저 살펴보고 그 피로에 붙일 수 있는 이름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이어서 완벽한 며느리·사위가 왜 애초에 어려운지 짚어보고, 연휴 한가운데서 마음을 잠시 쉬게 하는 방법 세 가지를 나누려 합니다. 답을 정해드리는 글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피로를 알아봐 주도록 곁에서 돕는 글이에요.
웃는 얼굴 뒤에 쌓이는 피로
상담을 하다 보면요. 명절 뒤의 피로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해 더 괴로워하는 분을 자주 만납니다. 한 분은 연휴 내내 부엌과 거실을 오가며 웃는 얼굴로 음식을 나르고, 어른들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고, 아이들까지 챙기며 이틀을 보냈다고 하셨어요. 누구도 모진 말을 하지 않았고 겉으로는 무난한 명절이었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도 저한테 뭐라고 안 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녹초가 됐는지 모르겠어요." 그분은 결국 자기 체력이 약한 탓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계셨습니다.
반대로 어떤 분은 사위 자리에서 지친 경우였어요. 따라주시는 술잔을 받고 잘 모르는 이야기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하루를 보냈는데 몸을 쓴 기억이 없으니 피곤하다고 말하기조차 어색하다고 하셨습니다. "한 일도 없는데 집에 오면 입이 안 떨어져요." 두 분의 모습은 달라도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한 것이 손발이 아니라 마음이었다는 점이에요.
감정 노동이라는 이름
감정 노동이라는 말은 들어보셨을 텐데 명절의 감정 노동은 무엇일까요?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Arlie Russell Hochschild)는 1983년에 펴낸 책에서 승무원들이 늘 밝은 표정을 유지하는 일을 살피며 이 수고에 이름을 붙였습니다.¹ 감정 노동(Emotional labor)은 상대가 보기에 알맞은 표정과 태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기 감정을 관리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는 일터 밖에서 하는 이런 수고를 따로 구분해 부르기도 했지만 이 글에서는 둘을 묶어 감정 노동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는 이보다 앞선 1979년 논문에서 이런 마음 관리가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사적인 자리에서도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² 자리마다 이럴 때는 이렇게 느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규칙이 있고, 사람들은 그 규칙에 맞추려고 자기 마음을 다듬는다는 거예요. 명절에도 그런 규칙이 있습니다.
명절에는 모두가 즐거워야 하고, 며느리와 사위는 그 즐거움을 거들어야 한다.
이 규칙을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누구나 압니다. 그래서 피곤해도 웃고 서운해도 괜찮은 척하며 하루를 보내게 되죠. 그 하루 끝에 몰려오는 피로는 게으름이 아니라 노동의 흔적입니다.
겉으로 짓는 표정과 속마음 사이
혹실드(1983)는 감정 노동을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¹ 속마음은 그대로 둔 채 표정만 바꾸는 방식, 그리고 그 자리에 맞는 마음을 실제로 느껴보려 애쓰는 방식이에요. 말이 좀 어렵죠? 쉽게 말하면 앞의 것은 속으로는 지쳤는데 입꼬리만 올리는 것이고, 뒤의 것은 오랜만에 자식들을 보시니 반가우시겠지 하고 마음을 그쪽으로 데려가 보는 것입니다.
2011년 한 직업건강심리학 학술지에 실린 메타분석은 30년에 걸친 감정 노동 연구 가운데 독립적인 연구 95편을 모아 이 방식들과 마음 상태의 관련을 살폈습니다.³ 느끼는 것과 보여야 하는 것 사이의 어긋남, 그리고 표정만 바꾸는 방식은 마음이 지친 정도를 보여주는 여러 지표와 뚜렷하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상관계수 .39에서 .48). 마음을 그쪽으로 데려가 보는 방식은 그 관련이 약했고요. 일터의 연구라 가족 행사에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짐작해볼 실마리는 됩니다. 힘든 것은 웃는 일 자체라기보다 웃는 얼굴과 속마음 사이의 거리일 수 있거든요.
그 거리는 나만 지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 만난 여성 두 사람이 속상한 주제로 대화하는 실험에서 한쪽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참도록 했더니 대화가 매끄럽지 않았고 상대방의 혈압 반응까지 커졌습니다.⁴ 이어진 실험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친밀감이 덜 생겼고요. 관계를 지키려고 삼킨 표정이 오히려 가까워지는 길을 막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완벽한 며느리·사위가 어려운 이유
며느리와 사위는 결혼과 함께 하루아침에 생기는 자리입니다. 연습할 시간도 없이 그 집안의 방식과 기대를 한꺼번에 받아 들게 되죠. 그 기대는 대개 말로 전해지지 않아 눈치로 알아채야 합니다.
역할이 요구하는 것을 다 채우지 못해 느끼는 버거움을 다룬 한 사회학 이론은 한 사람이 맡은 역할들의 요구를 모두 합치면 감당할 수 있는 양을 넘기 쉽다고 보았습니다.⁵ 그래서 사람은 모든 요구를 채우는 대신 어디에 얼마만큼 힘을 쓸지 조율하며 살아간다고요. 이 관점에서 보면 모든 기대를 채우는 완벽한 며느리·사위는 애초에 성립하기 어려운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틈을 자기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다들 하는 건데 나만 유난인가.' '내가 속이 좁은 사람인가 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그만큼 잘하고 싶었다는 증거이기도 해요. 한 연구에서는 대학생들이 여러 역할 속에서 이게 나답다고 느끼는 정도가 높을수록 심리적·신체적 안녕이 더 높았습니다.⁶ 역할을 잘 해내는 것만큼 그 역할 안에 나를 조금 남겨두는 일도 중요하다고 읽을 수 있어요.
무대에서 잠시 내려오는 시간
명절이라는 무대를 통째로 없앨 수는 없습니다. 대신 무대 위에 있는 시간과 내려와 쉬는 시간을 나눠볼 수는 있어요.
세 가지를 권해드립니다.
하나, 지친 마음에 이름을 붙여보세요. 피로가 몰려올 때 속으로 나 지금 마음으로 일하는 중이구나 하고 한 번 말해보는 겁니다. 이름이 붙으면 내가 예민한가라는 물음이 오늘 일을 많이 했구나라는 인정으로 바뀌기 쉽습니다.
둘, 무대 뒤 분장실 같은 틈을 만들어보세요. 가까운 곳 심부름, 동네 한 바퀴 산책, 차 안에서 보내는 10분이면 충분합니다. 표정을 내려놓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다시 무대에 오를 힘이 생기거든요. 그 틈에 좋아하는 노래 한 곡처럼 나다운 조각 하나를 챙겨도 좋아요.
셋, 배우자와 서로의 노동이 보이게 해주세요. 한 사람은 부엌에서 애쓰고 다른 사람은 술자리에서 애쓰다 보니 서로의 피로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오늘 우리 집에서 애써줘서 고마워요" 한마디를 먼저 건네보세요. 머무는 시간과 역할을 미리 정해두는 방법은 명절 전 마음의 경계를 다룬 글에서 함께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일에는 퇴근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한 일도 마찬가지예요. 연휴가 끝나면 며칠쯤은 무대 의상을 벗고 내 표정으로 지내는 시간을 허락해 주세요. 잘 해내지 못한 장면이 떠오르더라도 그때도 나는 관계를 지키려고 애썼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해마다 같은 피로가 되풀이된다면 그 이야기를 편하게 꺼내 놓을 자리를 찾아보셔도 좋겠습니다.
착한 며느리나 괜찮은 사위가 되기 전부터 여러분은 이미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해요.
참고문헌
- Hochschild, A. R. (1983). The managed heart: Commercialization of human feelin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Hochschild, A. R. (1979). Emotion work, feeling rules, and social structure.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85(3), 551-575. https://doi.org/10.1086/227049
- Hülsheger, U. R., & Schewe, A. F. (2011). On the costs and benefits of emotional labor: A meta-analysis of three decades of research. Journal of Occupational Health Psychology, 16(3), 361-389. https://doi.org/10.1037/a0022876
- Butler, E. A., Egloff, B., Wilhelm, F. H., Smith, N. C., Erickson, E. A., & Gross, J. J. (2003). The social consequences of expressive suppression. Emotion, 3(1), 48-67. https://doi.org/10.1037/1528-3542.3.1.48
- Goode, W. J. (1960). A theory of role strain.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25(4), 483-496. https://doi.org/10.2307/2092933
- Sheldon, K. M., Ryan, R. M., Rawsthorne, L. J., & Ilardi, B. (1997). Trait self and true self: Cross-role variation in the Big-Five personality traits and its relations with psychological authenticity and subjective well-being.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73(6), 1380-1393. https://doi.org/10.1037/0022-3514.73.6.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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