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무거운 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나로 남는 거리를 아직 찾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이너프심리상담센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늘어납니다. 가족을 미워하는 것도 아닌데 달력에 동그라미가 쳐진 그날이 다가올수록 잠이 얕아지고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속이 자주 불편해진다고 하십니다. 저는 그럴 때 아주 오래 애써오신 거라고 말씀드립니다.
이 글에서는 명절이 왜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그다음 가까이 있으면서도 나로 남는 힘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명절을 앞두고 미리 해볼 수 있는 준비 세 가지를 나누려 합니다. 정답을 드리는 글은 아니에요. 여러분이 자기에게 맞는 거리를 직접 찾아가시도록 곁에서 재료를 몇 가지 놓아드리는 글에 가깝습니다.
명절이 유독 무거워지는 이유
명절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날입니다. 우리는 바깥세상에서 각자의 이름과 역할을 새로 만들며 살아가는데 고향 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오래전 그 집에서 맡았던 자리로 되돌아가곤 합니다. 참는 사람, 중재하는 사람, 늘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 그 자리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기 때문에 마음이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자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명절 다음 날의 피로는 장거리 운전이나 음식 준비 때문만은 아니에요.
또 하나는 속마음과 다른 표정을 오래 유지하는 일에 드는 비용입니다. 불편한 질문을 받고도 웃어넘기고 서운한 말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동안 우리 마음은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오래 살펴본 한 연구에서는 떠오르는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눌러두는 습관이 관계 만족이나 안녕감과 부정적으로 관련된다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¹ 억누르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그 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뜻이죠.
여기에 우리 사회가 오래 반복해온 문장이 얹힙니다.
가족인데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
이 말은 너그러움을 권하는 듯 들리지만 실제로는 불편을 느낀 사람에게만 조용히 책임을 지웁니다. 그래서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스스로 속 좁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입을 다물게 되죠.
상담실에서 만난 한 분은 명절을 2주 앞두고부터 새벽에 눈이 떠진다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미운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는 거예요.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가기 싫은 게 아니라, 갔다 온 뒤의 제가 무서워요." 명절이 버거운 분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작아지는 자기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가까움과 나를 동시에 지키는 힘
여기서 도움이 되는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가족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하나의 정서적 단위로 보고 오래 관찰한 정신의학자 머레이 보웬(Murray Bowen)이 제안한 자기분화(Differentiation of self)입니다.² 말이 좀 어렵죠? 쉽게 풀면 가까운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 사람들의 감정에 통째로 휩쓸리지 않고 나로 남아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분화가 거리 두기나 단절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워요. 연결을 끊어야만 내가 지켜진다면 그것은 분화라기보다 도피에 가깝습니다. 어머니가 한숨을 쉬실 때 그 한숨을 알아차리고 마음이 쓰이되 그 한숨이 곧 나에 대한 평가는 아니라고 구분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분화된 자리예요. 알아차리는 것과 뒤집어쓰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어떤 분은 식탁에서 오간 말을 몇 달씩 곱씹으며 자기를 탓합니다. 반대로 어떤 분은 같은 말을 듣고도 서운하네 하고 넘긴 뒤 다음 주에 안부 전화를 겁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아니에요. 상대의 감정과 내 가치를 떼어 둘 공간이 마음에 얼마나 마련되어 있는지의 차이에 더 가까울 수 있거든요.
닫는 경계와 여는 경계
가족을 오래 연구해온 또 다른 흐름에서는 가족 안에 서로가 어디까지 관여할지에 관한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고 봅니다.³ 이 선이 지나치게 흐려지면 한 사람의 기분이 온 집안의 날씨가 되고, 너무 두꺼워지면 서로의 어려움이 아예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경계는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정도로 여닫히는가의 문제입니다.
경계라는 말을 듣고 담을 떠올리는 분이 많습니다. 다시는 상처받지 않도록 높이 쌓아 올리는 벽이요. 반대로 어떤 분은 필요할 때 열고 버거울 때 닫을 수 있는 문을 떠올리세요. 건강한 경계는 후자에 더 가까울 수 있거든요. 관계를 끊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오래 이어가기 위해 세우는 것이니까요.
관계를 아예 끊는 쪽이 답이 되기 어려운 이유는 자료로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148편의 연구에 참여한 30만 8,849명의 자료를 모아 2010년 한 의학 학술지에 발표된 분석에서는 사회적 관계가 튼튼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추적 기간에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50% 높게 나타났습니다.⁴ 관계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동시에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일은 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손잡이를 안쪽에 다는 것입니다.
명절 전에 미리 해볼 세 가지
명절 당일 그 자리에서 마음을 다잡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미 몸이 옛 자리로 돌아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준비는 미리 해두는 편이 낫습니다. 세 가지를 권해드립니다.
하나, 올해 명절에 지키고 싶은 것을 한 문장으로 적어보세요. 모든 것을 다 지킬 수는 없으니 딱 하나만 고르는 겁니다. 올해는 결혼 계획 이야기가 나와도 변명하지 않겠다처럼 구체적일수록 좋아요. 내가 정했다는 감각 자체가 힘이 됩니다. 사람에게는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느낌이 기본적인 심리적 자양분이라는 점이 여러 연구에서 거듭 관찰되어 왔습니다.⁵
둘, 머무는 시간을 미리 정하고 돌아올 길을 확보해두세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자리는 그 자체로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두 시간이든 하룻밤이든 스스로 정한 끝이 있으면 그 안에서는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어요. 도망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로 잘라두는 일입니다.
셋, 자리를 뜰 수 있는 나만의 문장을 준비해두세요.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같은 짧은 말이면 충분합니다. 미리 연습해둔 문장은 마음이 흔들릴 때 나 대신 나와줍니다.
마무리하며
명절이 무겁다는 것은 여러분이 그 관계를 여전히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자리는 애초에 무겁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무게를 없애려 애쓰기보다 그 무게를 어디에 어떻게 놓을지를 정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경계는 사랑을 줄이는 장치가 아니라 사랑을 오래 하기 위한 장치예요.
돌아오는 길에는 스스로에게 한마디 건네보세요. 오늘 애썼다고요. 자기에게 너그러운 태도가 힘든 순간에 마음이 덜 무너지도록 돕는다는 점은 여러 연구에서 꾸준히 이야기되어 왔습니다.⁶ 자기가 자기에게 건네는 인정은 그 자리에서 바로 받을 수 있는 인정이거든요.
혹시 올해도 하고 싶은 말을 삼켜야 했다면 그것이 여러분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는 것만 기억해주세요.
참고문헌
- Gross, J. J., & John, O. P. (2003). Individual differences in two emotion regulation processes: Implications for affect, relationships, and well-being.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85(2), 348-362. https://doi.org/10.1037/0022-3514.85.2.348
- Bowen, M. (1978). Family therapy in clinical practice. Jason Aronson.
- Minuchin, S. (1974). Families and family therapy. Harvard University Press.
- Holt-Lunstad, J., Smith, T. B., & Layton, J. B. (2010). Social relationships and mortality risk: A meta-analytic review. PLoS Medicine, 7(7), e1000316. https://doi.org/10.1371/journal.pmed.1000316
- Deci, E. L., & Ryan, R. M. (2000). The "what" and "why" of goal pursuits: Human needs and the self-determination of behavior. Psychological Inquiry, 11(4), 227-268. https://doi.org/10.1207/S15327965PLI1104_01
- Neff, K. D. (2003). Self-compassion: An alternative conceptualization of a healthy attitude toward oneself. Self and Identity, 2(2), 85-101. https://doi.org/10.1080/15298860309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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