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에 유독 처지고 허무해지는 마음은 게으름의 증거가 아니라 빛과 리듬이 바뀌는 계절에 몸과 마음이 적응하느라 애쓰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여름 내내 버텨온 기운이 선선한 바람과 함께 빠져나가는 느낌, 여러분도 한 번쯤 겪어보셨을 거예요. 이너프심리상담센터에서도 이맘때면 이유 없이 가라앉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해가 짧아지고 공기가 바뀌는 시기에 기분이 함께 출렁이는 것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에요. 이 글에서는 계절에 따라 마음이 달라지는 현상이 무엇인지, 가벼운 처짐과 살펴볼 신호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그리고 이 시기를 조금 덜 버겁게 지나는 작은 돌봄을 차례로 다루겠습니다.
가을 문턱에서 가라앉는 마음
상담을 하다 보면요. 9월 말부터 비슷한 이야기가 조금씩 늘어납니다. 특별히 나쁜 일이 없는데 아침마다 몸이 무겁고, 좋아하던 일에도 손이 잘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예요. 저녁이 빨리 오는 것만으로 하루를 통째로 잃은 듯 허전하다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면 많은 분이 스스로를 먼저 탓하곤 해요.
다들 멀쩡한데 나만 왜 이렇게 늘어질까.
하지만 이 질문은 방향이 조금 어긋나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은 빛의 양과 기온에 맞춰 잠과 식욕, 기운을 조절하거든요. 계절이 바뀌면 그 조절도 다시 맞춰야 하니 에너지가 드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흐트러진 생활 리듬을 되돌리는 방법은 연휴 뒤 일상 복귀를 다룬 글에서도 함께 살펴볼 수 있어요.
계절을 타는 마음에 붙은 이름
그렇다면 계절을 탄다는 건 무엇일까요? 정신의학자 노먼 로젠탈(Norman Rosenthal)은 1984년 해가 짧아지는 가을과 겨울에 우울이 찾아왔다가 봄과 여름이면 가라앉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고했습니다.¹ 이 패턴에 붙은 이름이 계절성 정서장애(Seasonal Affective Disorder)예요. 잠이 늘고, 단 음식이 당기고, 기운이 떨어지는 모습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말이 좀 어렵죠? 쉽게 말하면 달력에 맞춰 마음의 날씨가 되풀이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아요.
중요한 건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이후 일반 주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계절에 따라 기분과 행동이 달라지는 경험은 꽤 흔했고, 진단 기준에 못 미치는 가벼운 형태로 겪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² 계절을 타는 마음은 있다와 없다로 딱 나뉘기보다 옅고 짙은 정도의 차이에 가까울 수 있거든요. 그러니 이 이름은 딱지를 붙이는 말이 아니라, 내가 유별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말로 쓰였으면 합니다.
가벼운 처짐과 살펴볼 신호 사이
어떤 분은 가을이면 며칠 늘어지다가 햇볕 좋은 주말 한 번에 기운을 되찾아요. 반대로 어떤 분은 몇 주째 잠과 식욕이 흔들리고, 해야 할 일을 해내기 어려울 만큼 가라앉기도 하죠. 우울의 정도를 살필 때 전문가는 기분만 보지 않고 잠, 식욕, 기운, 일과 흥미처럼 몸과 생활의 여러 영역을 함께 봅니다.³ 기분 하나만으로 나를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해요.
스스로 살펴볼 만한 신호는 이렇습니다. 가라앉은 기분이 몇 주씩 거의 매일 이어지는지, 좋아하던 일에서 즐거움이 사라졌는지, 일상을 꾸리기가 눈에 띄게 어려워졌는지예요. 이런 신호가 겹친다면 혼자 버티기보다 전문가와 대화해볼 영역일 수 있습니다. 특히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스친다면 망설이지 말고 곁의 사람이나 자살예방상담전화(109)에 먼저 알려주세요.
허무함 아래 비어 있는 것
상담실에서 만난 한 분은 가을만 되면 퇴근 후 불 꺼진 방에 누워 휴대폰만 넘긴다고 했습니다. "여름엔 뭐라도 했는데 지금은 다 의미 없게 느껴져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의 가을에는 두 가지가 함께 줄어 있었어요. 저녁마다 나가던 산책 모임이 날씨 탓에 끊겼고, 일이 바빠지면서 스스로 고른 일정이 하나도 남지 않았던 겁니다. "제가 게을러진 줄만 알았어요." 그 말을 하며 그분은 조금 웃으셨습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느낌,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느낌,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채워질 때 활력과 안녕감이 커집니다.⁴ 허무함은 때로 이 세 가지가 계절과 함께 조용히 빠져나간 자리에서 올라오곤 해요. 그래서 이 시기의 돌봄은 기분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일보다, 비어 있는 자리를 작게 다시 채우는 일에 가깝습니다.
작게 해낸 일이 쌓이는 하루
기운이 없을 때 우리는 기분이 나아지면 움직이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우울감을 다룬 여러 연구를 모아 분석한 결과, 기분을 기다리기보다 작은 활동을 먼저 계획하고 해보는 방식이 우울감을 줄이는 데 효과를 보였습니다.⁵ 작게라도 직접 해낸 경험은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키우는 가장 든든한 재료가 되고요.⁶ 그래서 세 가지를 제안해봅니다.
하나, 아침 햇빛을 잠깐이라도 쬐어보는 것입니다. 계절성 우울을 다룬 연구들을 모아 분석한 결과 밝은 빛에 규칙적으로 노출되는 방법이 증상을 줄이는 데 효과가 있었습니다.⁷ 연구에서는 전문 장비를 썼지만, 일상에서는 출근길 한 정거장을 걸어보는 것부터 시작해볼 수 있어요.
둘, 하루에 스스로 고른 일 하나를 정해보는 것입니다. 화분에 물 주기, 좋아하는 차 한 잔 우리기처럼 작아도 괜찮아요. 해낸 뒤에 '오늘 이건 했네' 하고 한 번 알아봐주는 것까지가 한 세트예요.
셋, 끊긴 연결 하나를 다시 이어보는 것입니다. 여름에 자주 보던 사람에게 짧은 안부를 보내거나, 실내에서 함께할 수 있는 약속을 하나 잡아보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마무리하며
가을에 마음이 처지는 건 여러분이 약해서가 아니라 바뀐 계절에 맞추느라 몸과 마음이 애쓰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해가 짧아지면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는 날이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잘 버티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먼저 말해주려 합니다. 이 계절을 지나는 방법에 정답은 없지만, 오늘 해낸 작은 일 하나를 알아봐주는 데서 시작해볼 수 있어요. 가라앉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혼자 짊어지지 말고 함께 천천히 이야기 나눠봐요.
참고문헌
- Rosenthal, N. E., Sack, D. A., Gillin, J. C., Lewy, A. J., Goodwin, F. K., Davenport, Y., Mueller, P. S., Newsome, D. A., & Wehr, T. A. (1984). Seasonal affective disorder: A description of the syndrome and preliminary findings with light therapy. Archives of General Psychiatry, 41(1), 72–80. https://doi.org/10.1001/archpsyc.1984.01790120076010
- Kasper, S., Wehr, T. A., Bartko, J. J., Gaist, P. A., & Rosenthal, N. E. (1989). Epidemiological findings of seasonal changes in mood and behavior: A telephone survey of Montgomery County, Maryland. Archives of General Psychiatry, 46(9), 823–833. https://doi.org/10.1001/archpsyc.1989.01810090065010
- Hamilton, M. (1960). A rating scale for depression. Journal of Neurology, Neurosurgery, and Psychiatry, 23(1), 56–62. https://doi.org/10.1136/jnnp.23.1.56
- Ryan, R. M., & Deci, E. L. (2000). Self-determination theory and the facilitation of intrinsic motivation, social development, and well-being. American Psychologist, 55(1), 68–78. https://doi.org/10.1037/0003-066X.55.1.68
- Cuijpers, P., van Straten, A., & Warmerdam, L. (2007). Behavioral activation treatments of depression: A meta-analysis. Clinical Psychology Review, 27(3), 318–326. https://doi.org/10.1016/j.cpr.2006.11.001
- Bandura, A. (1982). Self-efficacy mechanism in human agency. American Psychologist, 37(2), 122–147. https://doi.org/10.1037/0003-066X.37.2.122
- Golden, R. N., Gaynes, B. N., Ekstrom, R. D., Hamer, R. M., Jacobsen, F. M., Suppes, T., Wisner, K. L., & Nemeroff, C. B. (2005). The efficacy of light therapy in the treatment of mood disorders: A review and meta-analysis of the evidence.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162(4), 656–662. https://doi.org/10.1176/appi.ajp.162.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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