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사 앞에서도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관계에서 나를 지켜온 방식이 상담실 문 앞에서 저절로 멈추지는 않으니까요.
이너프심리상담센터를 찾아오시는 분들 중에는 상담사 앞에서도 유난히 조심스러운 분들이 계십니다. 힘든 이야기를 하러 왔는데 막상 자리에 앉으면 상담사가 듣기 편할 만한 말을 고르게 된다는 거예요. 지난 회기에 한 이야기를 조금 좋게 다듬어 전했다고 뒤늦게 알려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몸이 먼저 판단한 것에 가깝습니다. 상담실은 무엇이든 말해도 되는 곳이라고 알고 오셨는데도 그렇습니다.
이 글에서는 상담실 안에서도 착한 사람 역할이 이어지는 이유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어서 말하지 않은 것들이 어떤 자국을 남기는지, 상담 관계가 그 가면을 어떻게 느슨하게 만드는지를 차례로 다루려 해요. 마지막에는 오늘부터 해볼 수 있는 작은 방법도 나누겠습니다.
상담실까지 따라오는 착한 사람 역할
상담을 하다보면요. 착한 사람 역할이 상담실 문턱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걸 자주 봅니다. 눈치를 보며 살아온 시간이 길수록 새로운 관계에서도 먼저 상대의 표정을 살피게 되거든요. 상담사가 지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다 보면 어느새 말이 짧아집니다. 이건 상담에 성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자기를 지켜온 방식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런 조심스러움은 생각보다 흔합니다. 2016년 한 상담심리 학술지에 실린 연구에서는 상담을 받았거나 받고 있는 성인 547명에게 물었더니, 93%가 상담사에게 한 번이라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¹ 숨기려는 사람이 유난히 많아서가 아니라, 사람이 관계 안에 있을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에 가깝습니다.
제가 만난 한 분은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늘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상담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힘든 한 주를 보내고 오신 날에도 먼저 제 안부를 물으셨어요.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도 잘 해내야 할 것 같았어요." 상담조차 평가받는 자리로 느껴졌던 겁니다.
말하지 않은 것들이 남는 자리
말하지 않고 넘어간 이야기는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장기 상담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물어본 한 연구에서는 적지 않은 이들이 회기 중에 말하지 않고 남겨둔 것이 있다고 답했고, 상담사들은 그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² 상담사가 무심해서가 아니라, 잘 감추는 사람은 정말 잘 감추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회기가 쌓여도 어딘가 닿지 않는 느낌이 남습니다.
흥미로운 건 그다음입니다. 어렵게 꺼낸 이야기의 전후를 내담자들에게 물은 연구에서는 말하기 전의 수치심과 불안이 컸던 반면, 말하고 난 뒤에는 안도감과 자부심, 그리고 자신이 조금 더 진솔해진 것 같다는 느낌을 이야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³ 두려움은 말하기 전에 가장 크다는 이야기예요. 물론 이건 여러 사람의 평균이고, 속도는 여러분이 정하시면 됩니다.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이라는 자리
상담실이 다른 관계와 다른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상담사는 여러분이 어떤 모습을 보여도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거두지 않기로 미리 약속한 사람이에요. 칼 로저스(Carl Rogers)가 1957년에 정리한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gard)이 바로 그 약속입니다.⁴ 말이 좀 어렵죠? 쉽게 풀면 잘 말해야 대접받는 자리가 아니라, 어떻게 말해도 자리가 유지되는 관계라는 뜻이에요.
이 자리가 왜 중요할까요? 여러 연구를 모아 살펴본 분석에 따르면 상담사와 내담자 사이 관계의 질은 상담 성과와 꾸준히 연결됩니다.⁵ 그러니 상담실에서 솔직해지는 일은 예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담이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하는 지점에 가깝습니다.
가면을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
그렇다고 다음 회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세 가지를 천천히 해보시면 좋겠어요.
하나, 감추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먼저 말해보세요. 내용을 다 꺼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직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는 한 문장만으로도 상담은 방향을 바꿉니다.
둘, 상담사에게 느낀 불편을 그 자리에서 꺼내보세요. 상담 관계는 어긋났을 때 다시 맞출 수 있고, 그 조율 과정 자체가 상담의 중요한 재료가 됩니다.
셋, 잘 말하려는 마음을 잠깐 내려놓아 보세요. 정리되지 않은 말, 앞뒤가 맞지 않는 말도 상담실에서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다듬어진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줄 때가 많거든요.
상담실에서 만난 또 다른 분은 늘 밝은 목소리로 회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어느 날 처음으로 "오늘은 아무 말도 하기 싫어요."라고 말한 뒤 한참을 조용히 앉아 계셨어요. 그날 이후 상담은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밝지 않아도 이 자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하며
상담실에서까지 착한 사람이 되려 애쓰셨다면, 그건 여러분이 관계에서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아오셨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입니다. 잘못이 아니라 애쓴 자국이에요. 가면은 억지로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다고 느껴질 때 스스로 느슨해집니다. 저는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고, 벗을지 말지를 정하는 사람은 언제나 여러분입니다.
오늘 상담실에서 하지 못한 말이 있어도 그 말을 못 한 자신을 탓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다음 회기에 그 한 문장을 꺼내볼 여지만 남겨두시면 충분해요. 여기까지 오신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일을 하신 겁니다.
참고문헌
- Blanchard, M., & Farber, B. A. (2016). Lying in psychotherapy: Why and what clients don't tell their therapist about therapy and their relationship. Counselling Psychology Quarterly, 29(1), 90-112. https://doi.org/10.1080/09515070.2015.1085365
- Hill, C. E., Thompson, B. J., Cogar, M. C., & Denman, D. W. (1993). Beneath the surface of long-term therapy: Therapist and client report of their own and each other's covert processes. Journal of Counseling Psychology, 40(3), 278-287. https://doi.org/10.1037/0022-0167.40.3.278
- Farber, B. A., Berano, K. C., & Capobianco, J. A. (2004). Clients' perceptions of the process and consequences of self-disclosure in psychotherapy. Journal of Counseling Psychology, 51(3), 340-346. https://doi.org/10.1037/0022-0167.51.3.340
- Rogers, C. R. (1957). The necessary and sufficient conditions of therapeutic personality change. Journal of Consulting Psychology, 21(2), 95-103. https://doi.org/10.1037/h0045357
- Horvath, A. O., Del Re, A. C., Flückiger, C., & Symonds, D. (2011). Alliance in individual psychotherapy. Psychotherapy, 48(1), 9-16. https://doi.org/10.1037/a0022186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상담사와 함께 정리해보세요.
본 글은 정보 제공 및 교육 목적입니다. 개별 사례의 의학적·심리학적 진단 또는 치료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구체 상황은 전문가의 직접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