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미루는 것은 시간을 잘 쓰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 일을 떠올릴 때 밀려오는 불편한 기분을 잠시 밀어내는 중일 수 있습니다. 계획표를 다시 짜도 그대로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미룬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문득 시계를 봅니다. 한 시간이 지나 있고, 마음은 아침보다 더 무거워졌어요. 이너프심리상담센터에서 만나는 분들도 이 장면을 자주 꺼내 놓습니다. 그리고 대개 같은 결론에 도착하시죠. 내가 게으르다는 결론이요.
그런데 미룬 그 시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보입니다. 그 한 시간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 않았어요. 오히려 꽤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밀려오는 불편한 기분을 어떻게든 견디는 일을요.
미룸이 결정되는 30초
미룸은 하루 종일 이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아주 짧은 순간에 갈립니다. 그 30초를 느리게 늘려 보면 이런 일이 벌어져요.
먼저 할 일이 떠오릅니다. 거의 동시에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어깨가 조금 굳고, 명치가 답답해지고, 마음 한구석에서 막막함이 올라와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 지칩니다.
그다음 순간 손이 움직입니다. 휴대폰을 집거나, 갑자기 책상을 정리하거나, 냉장고를 열어요. 그러면 방금 그 답답함이 거짓말처럼 옅어집니다. 바로 이 짧은 안도감이 미룸의 정체입니다. 우리는 일을 피한 게 아니라, 그 일이 데려온 기분에서 잠깐 벗어난 거예요.
그러니 미루는 순간의 나는 무기력한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빠르고 유능하게 자신을 지키고 있는 셈이죠. 다만 그 방식이 오래가지 못할 뿐입니다.
미루는 건 일이 아니라 기분입니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팀 파이킬(Timothy Pychyl)이 동료 연구자와 함께 정리한 관점에 따르면, 미루기의 중심에는 시간 관리가 아니라 기분 조절(Mood repair)이 있습니다.¹ 당장 불편한 기분을 가라앉히는 일이 나중의 이익보다 앞서는 순간, 우리는 일을 뒤로 미룬다는 것이죠.
이 관점이 설명해 주는 게 하나 있어요. 왜 계획표를 아무리 촘촘하게 다시 짜도 그대로인지에 대한 답입니다. 시간표를 고치는 일은 그 일에 붙어 있는 기분을 건드리지 못하거든요. 부담스러운 일은 아침 아홉 시로 옮겨도 여전히 부담스럽습니다.
물론 미루기를 오래 들여다본 연구들은 이것을 스스로를 다스리는 힘이 잠시 어긋난 상태로도 설명합니다.² 다만 그 어긋남의 방아쇠를 당기는 게 대개 감정이라는 점은 함께 기억해 두면 좋겠어요. 게으름이라는 한 단어로 덮기에 우리 마음은 훨씬 복잡하게 움직입니다.
안도감의 유효기간
문제는 그 안도감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삼십 분쯤 지나면 원래의 답답함이 죄책감을 하나 더 데리고 돌아와요. 처음에 견디기 힘들었던 감정 위에 나에 대한 실망까지 얹히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번에 그 일을 떠올릴 때는 부담이 한 겹 더 두꺼워져 있습니다. 두꺼워진 만큼 밀어내고 싶은 마음도 커지고요. 미룸이 습관이 되는 과정은 의지가 닳아 없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할 일에 붙은 감정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 대목에서 많은 분이 자신에게 채찍을 듭니다. 정신 차리라고, 독하게 마음먹으라고요. 그런데 그 채찍은 대개 반대로 작동해요. 다그침은 그 일에 붙은 불편한 기분을 덜어 주지 않고 오히려 한 겹 더 입힙니다. 미룸을 이기려던 말이 미룸을 붙드는 말이 되는 셈이죠.
흔한 일이라는 사실이 주는 위로
미루는 사람이 유별난 것도 아닙니다. 독일에서 14세부터 95세까지 2,527명을 조사한 연구에서는 미루는 경향이 특히 젊은 연령층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³ 삶의 어느 시기에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자리라는 뜻이에요.
센터를 찾은 한 분은 할 일 목록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습니다. "쉬운 일인데도 자꾸 미루는 제가 한심해요." 그래서 그 쉬운 일을 떠올리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여쭤봤어요. 한참 뒤에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이것마저 제대로 못 하면 진짜 별거 아닌 사람이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었죠. 게을러서가 아니라, 너무 잘하고 싶어서 손이 얼어붙어 있던 겁니다.
그분에게 필요한 건 더 나은 계획표가 아니었어요. 그 일에 왜 그렇게 큰 무게가 실렸는지 함께 풀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딱 한 가지만 해본다면
오늘 해볼 것을 하나만 고른다면, 저는 이걸 권하고 싶어요. 미루고 싶어지는 순간에 기분에 이름부터 붙이기입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휴대폰으로 손이 가려는 그 순간에 잠깐 멈춰서 속으로 한 문장만 만들어 보세요. "지금 이 일이 지겹구나." "지금 잘 못 해낼까 봐 겁이 나는구나." "지금 너무 막막하구나." 정답을 맞힐 필요는 없습니다. 대충 맞는 이름이면 충분해요.
이름을 붙이면 두 가지가 달라집니다. 하나는 밀어내야 할 대상이 일 전체에서 하나의 감정으로 작아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감정에 맞는 다음 수를 고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겨움이라면 십 분만 하고 일어서기로, 두려움이라면 완성이 아니라 초안까지만으로, 막막함이라면 첫 줄 대신 제목만 적어 보는 식으로요.
시작을 못 했던 자리에서 곧바로 시작하게 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미루던 자리에서 자신을 미워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다음 시도는 훨씬 가벼워집니다.
미루고 있는 당신에게
오늘도 무언가를 미룬 채 이 글을 읽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어요. 그 미룸은 당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 아니라, 감당하기 버거운 기분을 어떻게든 다뤄 보려던 흔적입니다.
방식이 서툴렀을 뿐 마음은 내내 애쓰고 있었어요. 그 애씀을 알아보는 자리에서부터 다음 한 걸음이 시작됩니다. 오늘 하지 못한 일 몇 가지로 당신의 가치가 깎이지는 않아요.
참고문헌
- Sirois, F. M., & Pychyl, T. A. (2013). Procrastination and the priority of short-term mood regulation: Consequences for future self. Social and Personality Psychology Compass, 7(2), 115–127. https://doi.org/10.1111/spc3.12011
- Steel, P. (2007). The nature of procrastination: A meta-analytic and theoretical review of quintessential self-regulatory failure. Psychological Bulletin, 133(1), 65–94. https://doi.org/10.1037/0033-2909.133.1.65
- Beutel, M. E., Klein, E. M., Aufenanger, S., Brähler, E., Dreier, M., Müller, K. W., Quiring, O., Reinecke, L., Schmutzer, G., Stark, B., & Wölfling, K. (2016). Procrastination, distress and life satisfaction across the age range – A German representative community study. PLOS ONE, 11(2), e0148054. https://doi.org/10.1371/journal.pone.0148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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